[씨앗칼럼] 영혼의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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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맛집"을 검색합니다. 낯선 동네에 가도, 휴가지에 가도, 심지어 점심 한 끼를 위해서도 휴대폰을 들여다봅니다. 별점이 몇 점인지, 줄을 얼마나 서는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그렇게 우리는 맛과 값을 따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교회 식구들도 함께 "맛집"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찾는 맛집은 조금 다릅니다. 혀끝이 아닌 마음으로, 가격이 아닌 사랑으로 가는 곳. 우리는 그곳을 "영혼의 맛집"이라 부릅니다. 늘 다니던 식당, 머리를 자르러 가는 미용실, 잠깐 들르는 편의점—그 익숙한 자리들이 어느새 영혼 구원의 현장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께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영혼을 품고 10년을 한결같이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한두 번 전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수십 번을 다시 찾아가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셨다고 합니다. 그 긴 시간을 묵묵히 걸으신 발걸음 끝에 마침내 그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깊은 곳이 뜨거워졌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만큼의 사랑과 인내가 필요하구나." 우리가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빨리 돌아섰던 자리들이 떠올랐습니다. 한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렇게 오래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의 발걸음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맛과 값을 따라가던 걸음이, 영혼을 향한 걸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느 날 한 곳, 또 다른 한 곳. 우리 주변에 영혼의 맛집이 하나둘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곳들을 함께 찾아갑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 번이 아니라 꾸준히. 시간이 흐르면서 참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늘 무뚝뚝하시던 주인분이 먼저 인사를 건네시고, 잠깐 들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마음을 여시고, 어떤 날은 사는 이야기, 자녀 이야기, 아픈 이야기까지 흘러나옵니다. 관계가 열린다는 것은 이렇게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

[신앙에세이] 씨앗교회에 온: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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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거의 10년 가까이 믿고 머리를 맡기는 단골 미용실이 있습니다. 'ON:EU(온이유)'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곳인데, 이름만큼이나 마음씨가 곱고 아름다운 은영 원장님이 계신 곳입니다. 언제나처럼 미용 중 이런저런 수다가 오가다가, 우연히 미용 봉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교회 어르신들을 위한 미용 봉사를 부탁드렸을 때, 원장님은 흔쾌히, 그리고 참 맑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봉사 당일, 감사하게도 든든한 직원분과 함께 두 손 무겁게 씨앗교회 소그룹실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소그룹실은 금세 작은 미용실로 변신했습니다. 기대에 웃음꽃을 피우시며 교회를 찾아주신 어르신들, 사이좋게 손님이 된 엄마와 아들. 소박한 공간에 사람들의 온기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물론 처음 해보는 행사라 작고 귀여운 실수도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볕이 꽤나 뜨거웠던 날, 에어컨을 빵빵하게 튼다고 틀었는데도 땀이 뻘뻘 흘렀습니다. 좁은 공간에 문을 닫을 수 없어서 날이 매우 더워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잠시 후 확인해 보니 온도만 낮추고 모드를 에어컨이 아닌 히터로 둔 거였습니다. 머쓱해하며 상황을 설명해 드리니, 방 안에는 한바탕 시원한 웃음꽃이 터졌습니다. 잠시 땀을 쏙 빼게 해 드려 죄송했지만, 덕분에 어색했던 공기가 금세 훈훈하게 녹아내렸습니다. 이날 가장 제 마음을 울렸던 건, 한 할아버님의 환한 미소였습니다. 의자에 앉아 묵묵히 가위질 소리를 들으시던 할아버님은, 단정하게 정리된 거울 속 당신의 모습을 보며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내 평생 살면서 이렇게 정성 들여서 머리를 잘라준 미용은 처음이네요." 할아버님의 그 한마디에 원장님의 가위질하던 손끝에도, 지켜보던 제 마음에도 뭉클한 감동이 번졌습니다. 사실 할아버님께서 더욱 기뻐하셨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곁에서 평생을 함께해 온 아내분이 거동이 불편하셔서 미용실에 가기 어려우셨는데, 감사하게도 원장님과 직원분께서 직접 댁으로 방문해 할머니의 머리까지 곱게...

[주일 설교 요약] 약속을 향해 걷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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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7:1-8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공의회 앞에 선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자신을 향한 억울한 고소 앞에서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이스라엘 신앙의 뿌리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믿음의 조상이 어떻게 부름을 받았고 어떻게 걸어갔는지를 반추하며, 종교적 껍데기에 갇힌 그들에게 '진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직면하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상을 깎아 팔던 우상의 땅, 메소포타미아에 살았습니다. 그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 척박한 땅으로 먼저 찾아가셔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이 사실을 짚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성전'이라는 건물 안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내가 잘나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격 없는 나를 먼저 찾아와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살기 좋고 풍요로운 상업 도시 '하란'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가 다시 약속의 땅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데라의 '죽음' 이후였습니다. 내 삶을 지탱하던 과거의 힘, 세상의 가치관, 익숙한 안락함이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통과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이끄시는 진짜 약속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순종하며 걸어온 아브라함에게 손바닥만 한 땅도 주지 않으셨고, 당장 눈에 보이는 자식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이 400년 동안 끔찍한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암담한 미래를 예고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은 그 고난의 풀무불을 지나 그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심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짜 백성'을 만들어내고자 하셨기 때...

[씨앗 칼럼] 일상의 작은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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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교회는 동네 어르신들의 머리를 곱게 손질해 드리는 섬김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거창한 행사도, 큰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그저 어르신 한 분의 머리를 정성껏 만져드리고, 따뜻한 차 한 잔 건네며 안부를 묻는 작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자리에 하나님께서 어떤 만남을 예비해 두셨을지,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생각해 보면 이 자리도 누군가의 작은 걸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늘 다니던 미용실에서 미용사님과 나눈 평범한 대화 한 토막. 그 짧은 순간을 하나님은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시고, 한 영혼을 향한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이웃, 시장에서 인사를 나누는 상인, 자주 가는 가게의 주인 — 그 평범한 만남들 위에 하나님은 조용히 일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자리가 이미 선교지입니다. 대단한 일을 해야만 영혼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소 한 번, 따뜻한 인사 한 마디, 진심 어린 안부 한 줄. 그 작은 것들을 하나님은 귀하게 쓰십니다. 오늘 우리가 어르신들의 머리를 빗어드리는 손길도 그렇습니다. 가위질 한 번, 거울 너머의 미소 한 번에 예수님의 사랑이 담길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찾아오실 어르신 한 분 한 분을 마음에 품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가 매일 만나는 그 한 사람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분명 그 기도 위에 또 다른 만남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주일 설교 요약] 위기 앞에 서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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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6:8-15 ​사도행전 6장의 이야기가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지난주 일곱 집사 선출과 교회의 부흥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흥미롭게도 그 부흥의 역사가 기록되자마자, 연이어 스데반이라는 한 인물의 위기를 클로즈업합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은혜와 권능으로 사람들 앞에 섰고, 그를 통해 큰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강력한 생명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맹렬한 거부감을 불러왔습니다. ​자유인 회당 소속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논리를 당해내지 못하자, 결국 거짓 증인들을 내세우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을 공의회로 끌고 갑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모독하고, 예수께서 이곳을 헐고 모세의 전통을 고칠 것이라 말했다며 거짓 고소를 일삼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게 흐를 때(7절)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어둠의 영적인 공격(8절 이하)이 시작된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우리의 시선을 깨우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적당히 평안하게 지낼 때는 공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은혜가 고압으로 흐르기 시작할 때, 세상의 저항 또한 동일한 고압으로 닥쳐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저항이 없다면, 혹시 내 안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흐르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공동체를, 세상을 뒤흔들고 새롭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진짜 결론은 스데반이 겪는 억울함이나 앞으로의 순교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거짓 고소와 분노로 가득 찬 공의회 한복판에 선 스데반의 '얼굴'에 주목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쏘아보았지만, 스데반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록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거짓이 난무하는 현장 속에서 어떻게 이런 얼굴이 가능했을까요?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향한 거짓 고소나 분노한 사람들의 얼...

[씨앗 칼럼] 천국을 미리 맛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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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을 함께 드렸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빈틈도 있었고, 매끄럽지 않은 순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수룩함이 오히려 마음을 더 따뜻하게 했습니다. 잘 짜인 무대보다, 서로를 향해 진심을 건네는 살가운 풍경이 더 오래 남는 법이니까요.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누군가는 어색하게 웃었고, 누군가는 마음에 감동합니다. 작은 선물을 건네받는 손, 등을 토닥이는 손, 머리 위에 얹어진 축복의 손. 그 손들이 모여 한 폭의 따뜻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참 좋아하셨을 그런 풍경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보아라,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가!" (시편 133:1, 새번역) 그저 함께 있는 것.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고, 서로의 자리를 알아봐 주는 것. 그 평범함이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한 번 더 가는 곳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식구들입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따뜻한 품으로 다가가 주시기를, 우리가 함께 누린 사랑이 어떤 모양으로든 그분들 곁에도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가장 복된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요. 저는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그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따뜻하게 안아 주며, 사랑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 그것이 바로 천국의 모습이 아닐까요. 씨앗교회가 그런 교회로 빚어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아직 완성된 자리에 서 있지는 않지만, 사랑으로 서로를 일으키며 기도로 서로를 붙드는 그 길 위에서, 천국이 조금씩 우리 가운데 머물고 있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씨앗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그 천국을 살아 냅시다.

[주일 설교 요약] 건강한 교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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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성장의 위기를 넘어, 말씀이 흐르는 공동체로 본문: 사도행전 6:1-7 초대교회에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지만, 역설적으로 그 성장 속에서 뜻밖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호 음식 분배에서 소외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히브리파 사람들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외부의 거센 핍박에도 끄떡없던 공동체에, 이제는 내부의 분열이라는 교묘한 영적 공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위기 앞에서 열두 사도는 문제를 덮어두거나 단순히 행정적인 시스템을 고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태의 본질을 직시했습니다. 사도들은 무리를 불러 모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교회의 본질인 말씀과 기도가 약해지고, 사역자들이 사방의 필요를 채우느라 분주해져 정작 중요한 생명의 양식이 막히는 것이 공동체의 가장 치명적인 위기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들의 해결책은 자신들이 짐을 모두 짊어지고 더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형제자매들에게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직접 뽑으라고 권면합니다.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기준은 단순한 일머리나 세상적인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공동체 안에서 참된 신망을 받는 사람, 즉 영적인 질서와 본질을 아는 사람들을 세워 교회의 사역을 동역하게 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고, 신망 받는 일꾼들이 교회의 필요를 지혜롭게 채워갈 때, 교회는 놀라운 결과를 맞이합니다. 막혀있던 말씀이 멈추지 않고 다시 왕성하게 흘러갔고, 교회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나아가 가장 완고하고 결코 돌아올 것 같지 않던 제사장의 무리마저 이 복음 앞에 굴복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묵직한 도전을 던집니다. 내 주변에 '저 사람은 절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