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칼럼] 두 갈래 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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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아내와 함께 집 근처에 있는 아리산을 오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내도 저도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라, 등산이라기보다는 산보하기 좋은 낮은 산을 찾아 걸었습니다. 함께 걸으며 산이 내어주는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도 몸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산길을 걷다 보니 경사가 급한 지점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쪽은 짧지만 경사가 가파른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조금 더 길지만 완만하게 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골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가파르지만 빠른 길을, 또 어떤 이는 완만하지만 돌아가는 길을 택하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런 선택 앞에 놓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지나온 제 인생을 돌아보니, 젊음이 한창 왕성하던 때에는 빠르고 가파른 길을 택해 숨 가쁘게 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정말 좋은 길이라 여기며 그 길을 골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고 보니, 조금은 돌아가는 길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생각하면서 내딛는 걸음도 참 좋다는 마음이 듭니다. 신앙의 길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종 빠르게 자라고, 빠르게 응답받고, 빠르게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 합니다. 가파른 길이라도 빠르기만 하면 좋은 길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완만한 길로, 조금 돌아가는 길로 이끄십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곁에 계신 주님을 더 깊이 바라보게 되고, 함께 걷는 지체들을 살피게 되며, 그동안 지나쳐 온 은혜들을 천천히 곱씹게 됩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기까지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빠르게 솟아오른 씨앗이 늘 튼튼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디게, 그러나 깊이 뿌리를 내린 씨앗이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빠른 길이 늘 좋은 길은 아니며, 돌아가는 길이 결코 뒤처지는...

[주일설교] 흩어진 자들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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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8:1-4 예기치 않은 흩어짐, 실패가 아닌 말씀의 성취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는 오히려 끔찍하고 큰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 사울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성도들을 끌어내어 감옥에 넘겼고, 결국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가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위대한 부흥을 꿈꾸었을 성도들의 눈에 이 흩어짐은 완전한 실패요, 살기 위해 도망치는 비참한 패배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 우리 인생에도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흩어짐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 열심히, 바르게 살았는데 원치 않는 부서로 이동되거나, 재정적인 타격을 입거나,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등 기대와 전혀 다른 결과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건 아닐까? 내 믿음이 부족한 탓일까?"라며 혼란스러워합니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승천하시기 전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라고 약속하셨습니다 . 제자들은 능력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뻗어나가길 기대했겠지만, 하나님은 핍박을 피해 도망치는 그 비참한 발걸음을 통해서라도 기어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해 가십니다 . 흩어짐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 내 얄팍한 예상을 넘어선 하나님의 위대한 일하심이 시작되는 통로입니다 . 도망자의 신분으로 복음을 전한 이유: 첫째 아들의 비유 사도행전 8장 4절은 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돌아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 살기 위해 도망치는 자들이 정체를 숨기기는커녕, 발각되면 사울에게 잡혀 감옥에 갈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전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목사님께서는 이들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 그중에서도 '첫째 아들'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 집을 나갔던 둘째 아...

[씨앗칼럼] 사랑하며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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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이루고 싶고, 이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끝에서 돌아볼 때, 남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도 하나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가족도, 이웃도, 함께 신앙의 길을 걷는 지체들도 모두 사랑하도록 주어진 관계입니다. 목장 사역도, 예배도, 섬김도, 결국 그 본질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조건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도 어느 순간 금이 가고,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니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해 실망하거나 미워하기보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도 나처럼, 완전한 사랑을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관심, 진심 어린 격려, 그리고 이름을 부르며 드리는 기도. 이런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다시 일어설 힘이 됩니다. 크든 작든, 사랑을 주고 베풀며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내 안에서 나오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흘러가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먼저 채워지고, 그 사랑이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때, 우리는 지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사랑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고, 인내하며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섬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나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십시오. 삶의 끝에서 "나는 사...

[주일설교] 같은 자리 다른 반응

본문: 사도행전 7:57-8:1 닫힌 귀와 열린 하늘, 우리의 신앙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며,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자신을 맞이하려 하시는 벅찬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 그는 자신이 목도한 이 영광스럽고 놀라운 실재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보십시오!"라고 간절히 외쳤습니다 . 그러나 그 외침을 들은 공의회 무리들의 반응은 철저히 달랐습니다 . 그들은 어린아이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을 때 귀를 틀어막듯 길을 막아버렸고, 입을 다물라는 듯 큰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습니다 . 그리고 작은 돌도 아닌 크고 치명적인 돌덩어리들을 들고 그를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 스데반이 전하고자 했던 것은 모든 신앙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보아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 하지만 그들은 왜 그토록 분노하며 진리를 거부했을까요? 그것은 스데반이 바라본 신앙의 목적과 무리들이 쥐고 있던 신앙의 목적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 무리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 민족의 회복, 그리고 자신들이 세워놓은 율법 체계를 지키는 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 내 목적과 내 신념을 건드리는 진리가 선포될 때, 마음이 열리지 않은 자들은 찔림을 받는 대신 두려움이 섞인 분노를 표출하게 됩니다 . 우리는 이들을 비난하지만, 우리의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덧 익숙함에 빠져 습관적으로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됩니다 . 하지만 그저 익숙한 종교 행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내 목적을 이루려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대신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 스데반이 그 끔찍한 위기 속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 굳어진 마음의 귀를 열고,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에서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