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마음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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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4:32 - 5:11 씨앗교회 가족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은혜를 나누는 성도 여러분. 평안하신지요. 오늘 목사님께서는 '마음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사도행전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약 2000년 전 성령이 충만하게 임한 예루살렘 초대교회에는 세상이 본 적 없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를 조금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기꺼이 내어놓아,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펼쳐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이 눈부신 이야기 속에 담긴 두 가지 상반된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비춰주셨습니다. 먼저, 키프로스(구브로) 출신의 레위인 '요셉'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그를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라고 새롭게 불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전 재산을 아낌없이 내어놓게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원한 생명과 죄 사함의 은혜를 깊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무한한 은혜를 맛본 사람에게 이 땅의 물질과 소유는 더 이상 삶의 맹목적인 목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영적인 눈이 띄어 공동체의 지체들을 한 피를 나눈 진짜 '가족'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단순한 감정적 체험이 아니라, 이처럼 물질과 이웃을 대하는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는 '정체성의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부부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그들도 소유를 팔았지만, 그 값의 얼마를 감추고 일부만 사도들 앞에 가져왔습니다. 이들의 진짜 비극은 돈을 전부 바치지 않은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나바처럼 헌신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고 칭찬은 누리고 싶으면서도, 내 손에 쥔 물질은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탐심'과 '위선'이 그들의 영혼을 병들게 한 ...

[씨앗칼럼] 새 종이에 그리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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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처음 크레파스를 손에 쥐는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종이 앞에서 아이의 눈은 반짝입니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는 설렘,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된다는 자유. 그 하얀 종이는 단순한 종이가 아닙니다. 가능성 그 자체입니다. 요즘 씨앗교회에 처음으로 신앙의 발걸음을 내딛는 분들을 보며 저는 그 하얀 종이를 떠올립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난 분들은 교회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가 없습니다. 지금 보고, 지금 경험하는 것이 그분들에게 ‘교회’의 첫 그림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 공동체에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곳, 약한 자를 품는 곳, 용서가 흐르는 곳입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곳입니다.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관계가 교회입니다. 씨앗교회가 처음 신앙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바로 그 그림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해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 그 모습이 새로 오신 분들의 하얀 종이에 첫 그림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새로 오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씨앗교회는 완성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도 여전히 배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중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첫 그림을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여러분이 신앙 안에서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 아름다운 기억이 되도록 우리 모두 함께 애쓰겠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종이를 가지고 계신 분들께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새 종이를 내미시는 분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그분은 우리의 낡고 얼룩진 종이를 가져가시고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십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씨앗교회가 ‘씨앗’인 이유가 있습니다. 씨앗은 언제나 처음입니다. 씨앗은 언제나 가능성입니다. 씨앗은 언제나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함께 하나님이 꿈꾸시는 그림을...

[씨앗칼럼] 부활의 봄, 목장에 피어나는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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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스르르 녹으며 씨앗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요즘 목장 모임을 하면서 바로 그 봄 햇살 같은 따뜻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참 서툴렀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지켜온 마음을 누군가에게 꺼내 보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괜히 말했다가 오해받으면 어쩌지?' '내 이야기가 너무 무겁지는 않을까?' ​아마 속으로 이런 걱정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먼저 용기를 냈습니다.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마음 한편을 꺼내놓으면, 옆 사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줍니다. ​"나도 그런 적 있어요."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상처를 나누면 짐이 가벼워지고, 은혜를 나누면 감사가 두 배로 커집니다. 이제는 솔직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풍성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아이들이 함께합니다. 한 분이 아이들을 전담해 함께 놀아주신 덕분에, 어른들은 더욱 깊이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임이 끝날 때면 아이들도 얼굴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나옵니다. "다음에 또 와요!"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어른도 행복하고 아이들도 행복한 시간, 그것이 바로 목장입니다. ​부활은 2천 년 전 빈 무덤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닫혔던 마음이 열릴 때, 혼자였던 사람이 '우리'가 될 때, 어색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따뜻하게 웃을 때. 그 순간순간마다 부활의 역사는 지금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번 부활절, 그 살아있는 생명이 우리 씨앗교회 성도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함께 살아납니다. 🌱

[주일 설교]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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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사도행전 4:23-31 씨앗교회 가족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은혜를 나누는 성도 여러분. 평안하신지요. 오늘 말씀은 사도들이 종교 권력자들의 서슬 퍼런 위협에서 풀려난 직후의 장면을 조명합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곧바로 '동료들(교회 공동체)'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경고와 위협을 가했는지 있는 그대로 털어놓습니다. 자, 이제 막 탄생한 이 초대교회 공동체 앞에는 현실적인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졌습니다. 이때 교회는 위기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1. 문제보다 크신 창조주를 바라보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흩어지거나 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첫 문장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 저 악한 자들을 벌해주십시오!" 혹은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해주십시오!"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주님" 이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크심을 선포합니다. 내 눈앞에 있는 세상 권력자들의 위협이 아무리 거대해 보여도,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위기를 돌파하는 기도는 바로 이 지점, '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온전히 직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2. 안위가 아닌 '사명(담대함)'을 구하는 기도   이어지는 기도의 내용은 우리의 얄팍한 상식을 완전히 뒤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평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진짜 교회가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위협을 없애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그 위협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담대함' 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환난...

[씨앗칼럼] 인생은 일생이 아니라 삼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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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사람의 슬픔 중 하나는 집에 돌아갔을 때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년을 지나며 “내 인생이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이 찾아올 때, 마음 한편에 허무함이 스며들기도 합니다. 남성은 이루지 못한 것들 때문에, 여성은 자신을 다 내어주고 남은 공허함 때문에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단 하나일지 모릅니다. 바로 이 생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인생은 일생(一生)이 아니라 삼생(三生)이라고 말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의 시간이 이 땅을 준비하는 과정이듯, 이 땅에서의 시간은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끝을 향해 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을 준비하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또한 인생을 출장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연히 온 존재가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존재이며,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여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사명을 띤 여정입니다. 사명은 처음부터 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순종하며 살아갈 때 조금씩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씨앗교회 가족 여러분, 혹시 오늘 마음이 허전하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금은 준비의 시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허무가 아니라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의 시간 하나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우리 각자의 이야기는 아직 쓰이는 중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하루를 알고 계시며 조용히 함께 걸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도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인생은 일생이 아니라, 삼생입니다. 🌱

[주일 설교] 성령은 우리를 증인으로 만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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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4:1-22 씨앗교회 가족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은혜를 나누는 성도 여러분. 평안하신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아이러니한 순간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선한 일을 행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칭찬과 평안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고난과 장벽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처한 상황이 딱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태어나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단번에 일으켜 세웠습니다. 40년 만에 일어난 전무후무한 기적 앞에 수많은 사람이 경탄하며 모여들었고, 사도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구원할 복음을 전한 대가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닌, 어둡고 차가운 '감옥'이었습니다. 기득권을 쥐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전하는 사도들이 눈엣가시 같았기에, 날이 저물자 그들을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감옥의 차가운 바닥에 앉아있던 사도들이었다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아마도 "주님,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습니까? 불쌍한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한 것뿐인데, 왜 제게 이런 억울한 시련을 주십니까?"라며 깊은 탄식과 원망을 쏟아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역시 삶에서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한 현실에 갇히게 되면, 당황하며 하나님을 향해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지곤 하니까요. 그런데 다음 날 열린 재판의 풍경은, 우리의 얄팍한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립니다. 사도들을 심문하기 위해 대제사장 가문을 비롯한 그 시대의 최고 권력자들이 총출동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혈안이 되어 소리쳤던 바로 그 서슬 퍼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공포에 질려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두려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전혀 주눅 들지...

[씨앗 칼럼] 삼식이와 삼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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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책꽂이에서 우연히 한 권의 책을 펼쳤습니다. 기일혜 사모님의 수필집이었습니다. 책갈피가 꽂혀 있던 페이지를 열었는데,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삼식이와 삼복이.”  익숙한 단어에 웃음이 나며 읽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멈추는 장면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