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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죄는 값을 치르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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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로마서 6장 1–2절, 14절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롬 6:1–2)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롬 6:14) 은혜를 오해하면 우리는 요즘 복음의 은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과 연합되어 완전해졌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끝내셨기에 우리는 다시 죗값을 치를 이유가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죄, 지금의 죄, 앞으로 지을 죄까지 어떤 죄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을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의 구원은 나의 행위나 죄 때문에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날마다 구원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하셨다면, "이제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겠네" 하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바울이 묻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자녀는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사랑하니까 내 마음대로 살아도 돼"라고 말한다면, 그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셨으니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도 같은 오해입니다. 바울의 답은 분명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죗값은 치러졌지만, 죄의 결과는 남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죗값을 다 치르셨다면서요?" 맞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그 죽음의 값을...

[씨앗칼럼] 사람이 무엇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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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는 놀라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며칠씩 걸리던 일도 AI를 통해 몇 초 만에 해결합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어려운 질문에도 답을 얻습니다.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기계가 사람보다 더 잘하는 세상에서 사람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우리 사회는 점점 결과와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얼마나 잘하는지,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내는지,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때로는 자신의 존재 가치까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시선을 보여 줍니다. 시편 8편에서 다윗은 밤하늘의 달과 별을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4) 사람은 광대한 우주 앞에서 참으로 작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작은 사람을 기억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존귀한 이유는 무엇을 잘하거나 많은 것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며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능력이나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욱 따뜻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만, 교회는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 안에서 소중한 사람임을 알려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 목장도 그렇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삶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잘하는 사람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아이도 어르신도 모두 귀한 가족입니다. 사랑하는 씨앗 가족 여러분, 이번 한 주는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한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참 소중한 사람입니다." 기계가 아...

[주일 설교 + 간증]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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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2장 42–47절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행 2:42) 첫 교회가 한 네 가지 일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구원을 받은 뒤,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첫 교회는 네 가지에 힘썼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서로 사귀는 일, 빵을 떼는 일, 기도입니다. 44절부터 47절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줍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행 2:44–47) 앞서 본 영상의 세미나가 970차였습니다. 한 교회에서 970번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교회로서는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일 만큼 기도와 준비가 드는 일인데, 전국의 교회들이 이어서 섬겨 온 횟수가 970번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교회 부흥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참석자들이 그 교회 성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꿈꾸셨던 신약 교회가 다른 곳에도 세워지기를 소망하기 때문에 그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오늘 성도님들은 "사랑하는 교회", "말씀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 "서로 아픔을 치유해 주는 교회"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에게 좋은 교회는 사실 나에게 잘해 주는 교회입니다. 설교가 나에게 은혜가 되면 좋은 교회, 안 되면 나쁜 설교. 내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떠납니다. 중심이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와 내가 좋아하는 교회는 다릅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를 함께 이루...

[씨앗칼럼] 신앙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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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내 신앙만 잘 지키면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히 예배드리고, 혼자 기도하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길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어느 여성 산악인이 추운 겨울, 부산 금정산에서 출발해 76일 동안 설악산까지 홀로 종주한 적이 있습니다. 눈길과 추위, 동상과 감기로 몸도 지쳤지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고독이었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산을 오르다 저녁에 텐트를 치면 가장 먼저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너무 외로워서 눈사람에게라도 말을 걸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몸의 고통보다 함께할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이 더 힘들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길에도 눈 쌓인 능선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질병과 관계의 어려움,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은 시간입니다. 그때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나 혼자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전도서 4장 9–10절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함께하면 넘어졌을 때 서로 일으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서로의 연약함을 붙들어 주는 관계 속에서 자라갑니다. 모세가 팔이 내려오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냈기에 아론과 훌이 그의 팔을 붙들어 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연약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질 때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게 됩니다(갈 6:2). 가정교회로 모이는 우리 씨앗교회가 목장이라는 작은 공동체로 모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삶을 나누며 기도 제목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아론과 훌이 되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네 친구가 됩니다. 요즘 저는 씨앗교회가 서로 기대고 일으켜 주며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로 세워져 가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공동체야말로 예수님을 모르는 이웃도 찾아와 쉼을 얻을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

[주일 설교 + 씨앗뉴스] 함께 있어서 좋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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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요약 본문: 시편 133편 1–3절 "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 (시 133:1–3) 혼자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어릴 적 소풍 전날은 설레서 잠을 못 잤습니다. 못 먹던 음식도 있었고, 무엇보다 보물찾기가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놀이공원에 가는 것도 아니고 동네 솔밭에 가는 소풍이었지만 좋았습니다. 오늘 야유회도 그렇습니다. 맛있는 음식, 노래, 게임을 기대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 하면 재미있을까요. 혼자 하는 보물찾기, 혼자 먹는 밥, 혼자 하는 게임은 즐겁지 않습니다. 즐거움의 이유는 함께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133편은 형제자매가 어울려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지 노래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가족이라는 선물을 통해 무엇을 주시려는지 세 가지로 나누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가족으로 부르셨습니다 1절의 '함께 산다'는 같은 공간에 몸만 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나이도, 살아온 환경도, 좋아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맞아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도 안 맞는데 하물며 서로 다른 우리가 잘 맞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한 가족이 된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엡 2:19)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녀에게 부모와 형제가 있듯,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만 드리러...

[씨앗칼럼] 어려운 일을 만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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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 보면,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이나 선택해야 할 일들이 늘 우리 곁을 따라옵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곳이기에, 인생의 여러 문제 앞에 서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먼저 붙들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이 일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문제보다 그 밑에 있는 본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질이 아닌 것은 기꺼이 내려놓고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고 고집이 앞서서,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지켜 내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살다 보면 서로 다른 점이 보이고, 그 때문에 힘든 순간도 찾아옵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누가 맞고 누가 틀린지 차이를 따지기 시작하면 좀처럼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서로 돕는 배필로, 함께 걷는 동역자로 부르셨다는 그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 보면 좋겠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이 찾아올 때, 교회가 왜 세워졌는지 그 목적을 다시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으라고 세워진 곳입니다(마 28:19-20). 그러니 영혼을 살리고 제자를 세우는 일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서로 한 걸음씩 물러서고 양보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따라가는 제자를 세우는 일만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장을 위해 사람의 방법에 기대지 않고, 부흥이 조금 더디게 느껴지더라도 아직 주님을 모르는 이웃들에게 마음과 눈길을 두려 합니다. 저 역시 사역하며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다시 이 본질로 돌아갑니다. 제 부르심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딤전 2:4)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할 수 있어도, 한 영혼을 살리는 일만큼은...

[주일 설교]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예수님의 보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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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브리서 9장 11–14절 회개와 정죄감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것이 어디에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그것을 삶에서 누리지 못하는 신앙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예배하러 왔는데 예배가 잘 안 되고, 기도하러 왔는데 기도가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일, 나의 실수가 마음을 붙들어서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좀 회복되면 기도해야지" 하고 미루거나, 은혜를 받기보다 뒷자리에 앉았다 가는 신앙이 됩니다. 물론 죄를 지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꼭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개와 정죄감은 완전히 다릅니다. 회개는 잘못된 길을 깨닫고 멈추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정죄감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더 가까이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고도 계속 나를 정죄하고 있다면, 회개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그 피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보혈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죄책감에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단번에 이루신 영원한 속죄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일어난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과하여,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히 9:11–12)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제사장은 염소와 양을 제물로 드리는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