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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 간증]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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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2장 42–47절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행 2:42) 첫 교회가 한 네 가지 일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구원을 받은 뒤,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첫 교회는 네 가지에 힘썼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서로 사귀는 일, 빵을 떼는 일, 기도입니다. 44절부터 47절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줍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행 2:44–47) 앞서 본 영상의 세미나가 970차였습니다. 한 교회에서 970번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교회로서는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일 만큼 기도와 준비가 드는 일인데, 전국의 교회들이 이어서 섬겨 온 횟수가 970번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교회 부흥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참석자들이 그 교회 성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꿈꾸셨던 신약 교회가 다른 곳에도 세워지기를 소망하기 때문에 그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오늘 성도님들은 "사랑하는 교회", "말씀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 "서로 아픔을 치유해 주는 교회"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에게 좋은 교회는 사실 나에게 잘해 주는 교회입니다. 설교가 나에게 은혜가 되면 좋은 교회, 안 되면 나쁜 설교. 내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떠납니다. 중심이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와 내가 좋아하는 교회는 다릅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를 함께 이루...

[씨앗칼럼] 신앙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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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내 신앙만 잘 지키면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히 예배드리고, 혼자 기도하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길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어느 여성 산악인이 추운 겨울, 부산 금정산에서 출발해 76일 동안 설악산까지 홀로 종주한 적이 있습니다. 눈길과 추위, 동상과 감기로 몸도 지쳤지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고독이었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산을 오르다 저녁에 텐트를 치면 가장 먼저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너무 외로워서 눈사람에게라도 말을 걸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몸의 고통보다 함께할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이 더 힘들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길에도 눈 쌓인 능선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질병과 관계의 어려움,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은 시간입니다. 그때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나 혼자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전도서 4장 9–10절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함께하면 넘어졌을 때 서로 일으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서로의 연약함을 붙들어 주는 관계 속에서 자라갑니다. 모세가 팔이 내려오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냈기에 아론과 훌이 그의 팔을 붙들어 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연약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질 때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게 됩니다(갈 6:2). 가정교회로 모이는 우리 씨앗교회가 목장이라는 작은 공동체로 모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삶을 나누며 기도 제목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아론과 훌이 되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네 친구가 됩니다. 요즘 저는 씨앗교회가 서로 기대고 일으켜 주며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로 세워져 가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공동체야말로 예수님을 모르는 이웃도 찾아와 쉼을 얻을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

[주일 설교 + 씨앗뉴스] 함께 있어서 좋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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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요약 본문: 시편 133편 1–3절 "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 (시 133:1–3) 혼자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어릴 적 소풍 전날은 설레서 잠을 못 잤습니다. 못 먹던 음식도 있었고, 무엇보다 보물찾기가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놀이공원에 가는 것도 아니고 동네 솔밭에 가는 소풍이었지만 좋았습니다. 오늘 야유회도 그렇습니다. 맛있는 음식, 노래, 게임을 기대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 하면 재미있을까요. 혼자 하는 보물찾기, 혼자 먹는 밥, 혼자 하는 게임은 즐겁지 않습니다. 즐거움의 이유는 함께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133편은 형제자매가 어울려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지 노래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가족이라는 선물을 통해 무엇을 주시려는지 세 가지로 나누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가족으로 부르셨습니다 1절의 '함께 산다'는 같은 공간에 몸만 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나이도, 살아온 환경도, 좋아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맞아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도 안 맞는데 하물며 서로 다른 우리가 잘 맞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한 가족이 된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엡 2:19)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녀에게 부모와 형제가 있듯,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만 드리러...

[씨앗칼럼] 어려운 일을 만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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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 보면,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이나 선택해야 할 일들이 늘 우리 곁을 따라옵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곳이기에, 인생의 여러 문제 앞에 서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먼저 붙들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이 일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문제보다 그 밑에 있는 본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질이 아닌 것은 기꺼이 내려놓고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고 고집이 앞서서,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지켜 내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살다 보면 서로 다른 점이 보이고, 그 때문에 힘든 순간도 찾아옵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누가 맞고 누가 틀린지 차이를 따지기 시작하면 좀처럼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서로 돕는 배필로, 함께 걷는 동역자로 부르셨다는 그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 보면 좋겠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이 찾아올 때, 교회가 왜 세워졌는지 그 목적을 다시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으라고 세워진 곳입니다(마 28:19-20). 그러니 영혼을 살리고 제자를 세우는 일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서로 한 걸음씩 물러서고 양보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따라가는 제자를 세우는 일만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장을 위해 사람의 방법에 기대지 않고, 부흥이 조금 더디게 느껴지더라도 아직 주님을 모르는 이웃들에게 마음과 눈길을 두려 합니다. 저 역시 사역하며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다시 이 본질로 돌아갑니다. 제 부르심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딤전 2:4)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할 수 있어도, 한 영혼을 살리는 일만큼은...

[주일 설교]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예수님의 보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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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브리서 9장 11–14절 회개와 정죄감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것이 어디에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그것을 삶에서 누리지 못하는 신앙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예배하러 왔는데 예배가 잘 안 되고, 기도하러 왔는데 기도가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일, 나의 실수가 마음을 붙들어서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좀 회복되면 기도해야지" 하고 미루거나, 은혜를 받기보다 뒷자리에 앉았다 가는 신앙이 됩니다. 물론 죄를 지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꼭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개와 정죄감은 완전히 다릅니다. 회개는 잘못된 길을 깨닫고 멈추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정죄감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더 가까이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고도 계속 나를 정죄하고 있다면, 회개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그 피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보혈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죄책감에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단번에 이루신 영원한 속죄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일어난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과하여,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히 9:11–12)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제사장은 염소와 양을 제물로 드리는 사람인데...

[씨앗칼럼] 하나님의 때에 그려지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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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하늘이 참 높고 아름답습니다. 며칠 전 차를 타고 달리다 창밖으로 바라본 풍경은 울긋불긋 각양각색으로 물들어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붉게 물든 단풍,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 그 위로 펼쳐진 파란 하늘까지. 누가 붓을 들어 칠한 것도 아닌데 산과 들은 저마다의 빛깔로 계절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니 자연은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봄에는 연한 새순이 돋았고,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과 거센 장맛비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나무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 것처럼 묵묵히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가을 풍경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때를 따라 당신의 아름다운 뜻을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열심히 살아도 열매가 보이지 않는 계절이 있습니다. 한여름의 나무처럼 땀만 흘릴 뿐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전도서 3:11)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하나님의 손길은 쉬지 않고 우리 인생이라는 화폭 위에 그림을 그려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종종 내 힘으로 인생을 그려 보려고 애씁니다. 내가 원하는 색깔로, 내가 정한 시간표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조급해지고 실망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화가의 손에 온전히 맡겨질 때 완성됩니다. 우리 인생의 붓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며 순종입니다. 사랑하는 씨앗 가족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이 아직 여름처럼 덥고 힘겹게 느껴지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

[주일 설교] 이미 받은 것을 누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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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일서 4장 13–17절 하나님과 하나 된 존재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싸움은 정체성의 싸움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진 우리의 존재를 잊게 하고,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던 옛 모습이 "진짜 너"라고 속삭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영을 나누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창조주가 자신의 영을 나누어 주실 만큼 우리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요한은 13절, 15절, 16절에서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가 각각이 아니라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17절은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 담대함은 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약속의 성취에서 옵니다. 오늘 좀 못 살았다고 흔들리는 담대함이 아닙니다. 또한 이 담대함은 천국에 간다는 확신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이 세상에서 살게 합니다. 믿기 어려운 말씀들 그런데 솔직히 이 말씀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가족과 다투고, 염려로 잠을 못 이루고, 몸은 여기저기 아픕니다. 성경에는 이런 현실과 맞지 않아 보이는 말씀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기름 부으심을 받아 모든 것을 압니다" (요일 2:20)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고후 5:17)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엡 1:3) "우리 온전히 이룬 사람들" (빌 3:15) 성경은 "주실 것"이 아니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내 삶의 실제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 됨은 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출발점은 "내 영이 예수님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