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31일 주일 말씀


1. 씨앗칼럼: 포기하지 않는 것

우리 교회에 '영혼의 맛집'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보말 칼국수 집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인분을 품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주인분은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채소를 성도님께 먼저 연락해서 나눠 주시고, 정성껏 만든 묵을 드리고 싶어 아내의 연락처까지 물어보실 만큼 교회 식구들에게 마음을 쏟아 주시는 분입니다.

어제 성도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주인분이 농사지은 채소를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직접 가실 수 없어 대신 받아다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채소를 받으러 들렀다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교회 식구들이 식사하러 갔을 때 주인분과 함께 계셨던 한 분이 췌장암 말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후에 그분이 그곳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아내가 기도해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주인분도 흔쾌히 좋다고 하셨습니다. 목장 모임을 마치고 서둘러 아내와 함께 그분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분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 오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허탈한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냥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인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오는 길에 쉬는 날 함께 식사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주인분은 일요일에 쉰다고 하시며 뭐든지 잘 드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에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만남의 문이 열렸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을 만나도록 하는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 영혼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전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문이 닫혀 보일 때도, 기대했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그 영혼을 향한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 것—그것이 전도입니다.

오늘도 씨앗교회는 그렇게, 한 영혼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걸어갑니다.


2. 설교 요약: 보이지 않는 손을 잡고

본문: 사도행전 7:17-43, 53

나를 비추는 영적 거울 앞에 서다

스데반의 기나긴 설교는 어느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숙한 영적 영웅, '모세'의 이야기로 접어듭니다. 스데반을 재판에 세운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으며,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네가 감히 우리에게 모세를 가르치려 드느냐"며 스데반의 설교를 가소롭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이 대목에서 목사님께서는 '거울'이라는 아주 일상적이고도 뼈 있는 예화를 던지십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내 겉모습은 단장하지만, 정작 내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비추어보는 일에는 참으로 인색합니다. 남의 티끌과 잘못, 가족의 부족한 점은 기가 막히게 잘 보면서도,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은 지독히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목사님께서 곁에서 보지 못하는 모습을 일러주는 아내를 '거울'로 삼는다고 고백하셨듯, 우리 영혼에도 나의 진짜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춰줄 거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스데반이 그들 앞에 모세의 이야기를 꺼내 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확신에 차 있던 그들에게, 스데반은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53절)"라는 뼈아픈 거울을 들이댄 것입니다. 오늘 이 스데반의 설교는 2천 년 전 종교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어느덧 종교 생활에 익숙해져 '나는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비추는 영적인 거울이 됩니다.

내 손의 힘을 뺄 때 비로소 잡게 되는 '능력의 손'

모세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 선포됩니다. 애굽의 왕자로 자라난 모세는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웠고 말과 행동에 능력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동족을 향한 마음이 싹튼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며 자신의 힘과 권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 있는 애굽의 왕자인 자신'을 구원자로 알아보고 따라와 주기를 기대했지만, 백성들은 그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자신의 힘과 혈기, 세상의 권력으로 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망자가 되어 광야로 숨어든 모세는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처절한 낮아짐을 경험합니다. 애굽의 화려한 지식은 양을 치는 광야 생활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 그곳에서 모세는 철저히 자신이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목사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아내 십보라를 만난 사건을 언급하시며,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단하고 거창한 인물이 아니라, 양을 치던 연약한 여인과 같이 내 주변의 잔잔하고 평범한 손길을 통해 찾아온다는 사실을 짚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돈이 많아지고, 성공하고,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을 때가 아니라, 내가 붙들고 있던 세상의 지혜와 능력을 다 내려놓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모세가 양을 치던 초라한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들려 위대한 구원의 도구가 되었듯, 우리 역시 내 손에 꽉 쥔 것들을 미련 없이 놓아야만 하나님이 내미시는 구원의 손을 굳게 맞잡을 수 있습니다.

보이는 우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출애굽 이후 광야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적나라한 실상을 비춥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열 가지 재앙과 기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애굽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척박한 광야의 현실에 부딪히자, 그들은 모세의 말을 밀쳐내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원망을 쏟아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잠시 보이지 않자, 그들은 당장 금송아지를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쳤습니다.

왜 그토록 은혜를 경험하고도 끊임없이 애굽을 그리워하며 우상을 찾았을까요? 목사님께서는 우리의 정곡을 찌르십니다. 우상, 돈, 성공 같은 세상의 것들은 내 눈에 보이고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통제하며 즉각적인 기쁨과 안심을 얻을 수 있는 보이는 우상과 달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 인생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려놓고 잠잠히 기다려야만 하는데, 부패한 인간은 그 통제권을 잃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이처럼 끝끝내 눈에 보이는 우상을 좇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은 벼락이나 질병이 아니라, '그들을 내버려 두시는 것(42절)'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 사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데도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 계속 걸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앞에서 내 마음에 찔림이 있고 영적인 아픔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가장 확실하고 감사한 증거입니다.

설교의 결론에서 스데반은 이 모든 역사를 통해 율법의 본질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의 영적 껍데기를 고발합니다. 그들은 율법 조문은 완벽하게 외우고 지켰을지 몰라도, 그 율법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지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철저히 잃어버렸습니다. 반면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을 정죄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품고 용서하며 기도했습니다. 율법이라는 지식을 넘어,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그의 삶에 '능력'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씨앗교회 성도님들 또한 껍데기만 남은 종교 생활에서 벗어나, 내 손에 꽉 쥔 세상의 통제권을 다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굳게 붙잡는 한 주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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